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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성경말씀

마태복음 23장 29-39절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시다

by @블로그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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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9-39

<욕지거리를 날리며 하나님의 분노에 동참하리라>

1. 남은 죄의 분량을 채우다.(29-36)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화가 선포되고 있다. 너희들은 예언자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미면서 자신들이 그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이 피 흘리게 하는 일에 절대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스스로 그들의 조상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은 조상의 분량을 채워야 했다. 뱀 같은 그리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런 이유로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들과 지혜를 가진 율법학자들을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이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며, 회당에서 채찍질할 뿐 아니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핍박하고 박해할 것이다. 이런 너희들의 행위로 인해 의인 아벨의 피로 시작해서 너희들이 성전과 제단 가운데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죄업이 흘린 모든 피에 대해서 너희들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일들의 책임이 자 너희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앞에서 선포한 여섯 가지의 화를 이어 마지막 화에 대한 선포다. 이 선언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예견하고 있다. 이렇게 지도자들을 향해 경고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회개의 기회가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우선 그곳은 다윗과 솔로몬의 무덤 등 선지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조상인 선지자들이 많은 피를 흘린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그들보다 더 낫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교만한 생각으로서 자신들의 죄를 전가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교만함을 파악한 예수님은 너희들이 선지자들의 피에 대해서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너희들이 조상의 분량을 채운다고 하셨는데 이는 남은 죄,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남은 분량의 죄를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앞으로 메시아를 죽일 일을 남겨 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험악하고 심한 욕인 “뱀들의 새끼,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시며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다. 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절정의 순간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실 수 있느냐고 따지기 전에 그들의 위선적 행위가 얼마나 패역하고 악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핍박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심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마저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다. 이로써 그들은 조상들을 통하여 흘린 의로운 피, 그리고 이후로 남은 의로운 피, 즉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 남은 죄의 분량을 채우게 된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전가하려 했지만, 오히려 조상들의 죄까지 그들에게 전가되어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2.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시다.(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희들에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들이여! 암탉이 병아리를 그 품에 품는 것처럼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많이 품고자 했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그 사랑과 긍휼을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너희 집은 버림받아 황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들의 입술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그들을 향한 그분의 긍휼함과 사랑의 손길은 계속되었거만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거부했다. 여기서 암탉이라는 이미지는 독수리가 자신의 날개로 새끼를 품거나 태워 보호하는 또는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며 품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애달픈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이 품어주심의 사랑이 한 두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랑과 긍휼히 그들을 향했건만 그들은 그것을 모두 거부하고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그들 스스로 선택하여 차버린 것이다. 한없는 사랑과 인내를 주셨듯이 그들을 향한 심판 역시 매우 클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떠난 곳은 황폐한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젠 그들이 예수님이 찬송받으실 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황폐함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삶 속으로...
고1때 예수님을 만났다. 그 당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생각나는 여러 가지 죄 중에 하나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나의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색할 정도로 그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그 욕은 친구들끼리의 친근함을 표현하는 대화의 수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지난 나의 생을 돌아보았을 때, 욕하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결심한 것 중 하나가 이젠 앞으로 말씀을 읽고, 주를 찬송하는 입술로 결코 욕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 험한 군대에서 욕 한번 하지 않고 지낼 정도였다.

성경은 분내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으며, 잠언에서는 입술의 고백이 아름다워야 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불경한 자들을 향하여 화를 내며,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날렸다. 사실 언어가 순화된 채 번역돼서 그렇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도 당시의 문화 안에서 분노하고 욕지거리를 날리며 수많은 독설을 퍼부었다.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들의 입술이 거칠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상황이 거칠었기 때문이다. 분노를 살만한 일들, 욕지거리를 마땅히 들어야 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직설적으로 표현된 것뿐이다. 이러한 분노와 욕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패역한 세대를 향한 정직한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모든 것이 은혜로워야 한다고 강요한다. 신자는 아무리 세상이 암울하고 패역하고, 거칠어도 말과 행동에 있어서는 언제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은혜스러운 말과 생각, 거룩한 말과 생각만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책임 없는 은혜스러움의 강요는 불의하고 더러운 세상을 보면서도 나만큼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살아가게 한다. 즉,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세상을 향해 관심을 끈 채 나만 은혜스럽고 평안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세상을 실족하게 하는 이들에게만큼은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날림으로 하나님의 분노에 동참하리라! 더 이상 은혜를 가장한 고상함에 속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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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 하셨으니 이곳에서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믿고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 드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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