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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성경말씀

마태복음 21장 33-46절 주의 나라를 빼앗기다

by @블로그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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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33-46

<최고의 반전, 십자가 사건>

1. 포도원 농부 비유(33-41)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는 포도원을 훌륭하게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준 후에 잠시 멀리 떠나 있었다. 열매를 거둘 시기가 왔을 때 포도원 주인은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은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거나 죽였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들 또한 이전에 간 종들처럼 똑같이 당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들을 보내며, 그래도 차마 아들은 해치지 않고 존중하겠지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를 보내게 된다. 그러자 농부들은 오히려 아들을 죽이고 나면 자신들 포도원을 상속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을 잡아서 내쫓아 죽이고 만다. 그렇다면 주인이 돌아올 때 과연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제자들은 당연히 그들을 죽이고 소출을 제대로 비밀 농부를 새로 구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그리고 농부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칭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행태를 고발하셨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며, 주인과 농부는 소출을 반절씩 차지할 수 있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간 주인은 때가 되어 추수할 때가 이르자, 자신의 몫을 받기 위해 종을 보낸 것이었다. 그는 주인이기에 당연히 소출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몫을 주지 않기 위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죽인다. 그러자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지만 그들도 똑같이 때리고 죽인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다. 그 아들이 누군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렇다면 이후에 있을 일은 그들을 위한 심판이다.  

2. 주의 나라를 빼앗기다.(42-46)
예수님은 성경에서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너희의 하나님 나라를 빼앗아 열매 맺는 자들에게 주실 것이라 한다. 그 돌 위로 떨어지는 자는 부스러질 뿐 아니라, 그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 하신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곧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아고 그를 잡으려 했지만 모든 군중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군중들은 그를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시편118:22-23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건축하는 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인 된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돌은 메시아를 상징하는데, 버려진 돌, 즉 버려진 메시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실 것이다. 어디에든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명예로운 자리에 오르신다. 그런데 그 돌은 자신과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가루처럼 부서뜨리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존재는 무서워 떨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같은 자들을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려 하셨지만 오히려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을 줄 알고 더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해치려 했다. 그런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예수님을 이런저런 이유로 붙잡으면, 분명히 백성들이 들고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메시아를 보고도 이렇게 반응이 다를 수 있다.

3. 삶 속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면, 국가끼리, 민족끼리, 사회 계층의 사람들끼리, 사람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서로 손을 잡고 평화를 누리는 장면은 그다지 많지 않다. 피흘리고, 싸우는 이야기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다.

왜 그럴까? 인간은 악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쌓아 놓은 기득권이 있는데,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자신의 기득권을 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그가 없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불안감으로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류는 거절과 반목이라는 반복되는 역사를 담고 있는 존재다. 그 시대마다 인류는 자신들이 쌓아 놓은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시대를 거스르는 새로운 풍조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거절과 반복으로 그들과 대항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자신들만의 논리로 합리화하면서 그들과 맞서고 싸웠다. 이것은 선하고 악함의 논리가 아니다. 선악의 구도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취사 선택하면 되었다.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악으로, 자신들에게 유익하면 선으로 바꿔버렸다. 순전히 그들의 논리는 자신들에게 유익이 오느냐의 여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폭력이나 살인도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거절과 반목의 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건이다. 그것도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민 화해의 손길마저도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그 거절마저도 십자가의 구원사건으로 역전시키셨다. 최고의 반전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구원과 생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는 거절과 반복이었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오래 참음과 사랑과 구원이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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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 하셨으니 이곳에서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믿고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 드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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