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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성경말씀

성경공부 마태복음 16:21-28 예수님의 수난

by @블로그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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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21-28

<자기 존귀 속에서의 자기 부인>



1. 예수님의 수난 예고(21-23)
이젠 예수님께서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유대의 장로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뿐 아니라 사흘째 되는 날이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며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항변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나에게 걸림돌이 된다. 너는 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고 꾸짖으신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여 자신이 고난 받는 종이며, 곧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예견하셨었다. 그런데 이젠 직설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신다. 죽임을 당하실 뿐 아니라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개념은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당연히 자신들을 당장 구원할 절대적 존재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베드로가 직접적인 반응을 한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분이 죽으셔야 만 하는 고난의 메시아로 오신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다른 유대인과 제자들의 생각처럼 당장이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헤롯왕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수립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반응에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이다. 그를 마치 사탄으로 몰아붙이시며, 꾸짖으셨기 때문이다. 그를 그렇게 호되게 꾸짖으신 것은 한 가지 이유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까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 칭함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도구로 뒤바뀐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그를 몰아붙이신 것은 십자가 사역을 훼방하였기 때문이다. 만약에라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지 못하도록 설득하거나 이겼다면, 빈십자가가 되었을 것이며, 인간의 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았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니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것이다.

2. 제자도의 길, 십자가(24-28)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만약에 누구든지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지만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라 하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가진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 어떤 의미가 있겠으며, 사람이 무엇을 주어 자신의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곧 하늘의 아버지의 영광에 휩싸여, 자신의 천사들을 데리고 올 텐데, 그때가 되면 그가 각 사람들의 행위대로 갚아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면서, 그 고난의 길과 자기 부인의 길을 너희들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다. 스승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가 곧 제자다. 스승의 발걸음, 스승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 실제로 스승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제자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결말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곧 나의 참 제자라면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가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결정적 의지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 길이 곧 제자도이다. 먼저는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에서 제자도는 시작한다.

두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원래 십자가는 고대 근동 시대에 가장 잔인한 살인 도구였다.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사람을 죽이는 도구였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야말로 무거운 고난을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이 당하는 그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라가는 자가 곧 제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어떻게 하든지 고난을 피하려 한다. 평탄한 길을 원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하는 자는 죽고, 죽으려 하는 자는 산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궁극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길을 따라가 죽으려 하는 삶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떠한가! 지금 당장 살길, 편한 길을 선택한다. 이에 예수님은 좋다. 그러면 너희들이 당장 좋은 것을 추구함으로 천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결과는 궁극적인 목숨 즉,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너희들의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목숨과 바꿀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이겠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죽도록 일하고 놀다 죽어라”라는 말과 같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받을 날이 올 것이라 하신다. 결국 순종에 대한 사람들의 결단과 행함을 판단하실 것이다. 자기를 부인했는지,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랐는지를 판단하신 다는 것이다. 너희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건 다소 해석하기 어렵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제자의 길을 가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즉, 그분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다.

3. 삶 속으로…
인간은 타락 후에 항상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큰 자가 되려 할 뿐 아니라 힘든 일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 하는 성향을 추구함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이런 죄 된 성향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리라는 결단이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바탕이 있어야 십자가라는 것을 질 수 있다. 나도 있고 십자가도 있을 수는 없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거나 저 바닥으로 낮추는 것은 자기 학대이다. 그러나 가끔 이 사회는 자신을 학대하고 비하하는 것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것이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자기희생(?) 자기 소멸(?)을 종용한다. 이런 세상 풍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간혹 어떤 이는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존귀라는 인식 위에 서 있지 않은 자기 부인은 자칫 지나친 자기 비하로 이어져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적인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자부감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돌아봄이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 욕망은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욕구 중에서 영적인 갈망으로 육적인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을 때, 그것을 말씀으로 스스로 제어할 줄 아는가? 곧 나는 정말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든지 조정되고 제어될 수 있다는 자기 결심이 곧 자기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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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 하셨으니 이곳에서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믿고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 드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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